약관의 불공정성 판단기준 [Lawyer's View]

입력 2023-11-29 09:46  

이 기사는 11월 29일 09:4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 가서 하룻밤 묵을 일이 있었다. 먼저 묵을 만한 숙소를 찾기 위해 여행 관련 앱 중 하나를 휴대전화기에 설치하였다. 앱 설치 과정에서 수 많은 내용이 깨알 같은 글자로 적힌 이용약관이 화면에 떴지만, 이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능숙하게 화면 하단으로 내려가 ‘동의’ 버튼을 연속 눌러 앱 설치에 빠르게 성공하였다. 이어 해당 앱을 통해 숙소를 검색하니 다양한 숙소들이 다양한 가격에 나와 있고 같은 숙소에서도 다양한 옵션을 갖춘 다양한 가격들의 숙소가 올라와 있다. 어떤 숙소를 고를지 갈팡질팡하다가 최종적으로 한 곳을 고른 후, 다시 가격 위주로 방을 고르다가 마침내 ‘취소불가’옵션을 내걸고 다른 방보다 저렴하게 나온 방을 고른 다음 해당 앱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앱과 이메일을 통해 예약 완료 안내가 도착하였다. 클릭해 보니, 예약 관련 사항이 자세히 안내되어 있는 가운데, ‘취소불가’ 상품이라는 안내가 유난히 눈에 띈다. 순간 ‘도중에 사정이 생겨 숙박을 못하게 되면 저 돈을 다 날리게 되는 것인가?’라는 불안감이 스며들었으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애써 믿으며 이메일을 닫았다. 이후 다행이 별다른 사정 변경은 없었고, 가족들과 함께 합리적인 가격에 괜찮은 숙소에서 하룻밤 잘 머물다 왔다. 한편, 아무리 ‘취소불가’ 상품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개인적으로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취소할 수밖에 없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돌려주어야 공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숙소를 보니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이를 재판매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법원에서 위와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이 선고되었기에 이를 소개해 보려 한다.

해당 사안에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위와 같은 ‘환불불가’ 조항은 고객의 취소시기, 숙박예정일로부터 남은 기간, 취소객실의 재판매 가능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의무를 부담시키고 있고, 환불가능 조건 상품에 비하여 할인되는 금액도 그리 크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소비자 후생증대에 기여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규제법”) 제8조에서 무효로 규정하고 있는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지연 손해금 등의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시정조치를 명하였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대략 아래와 같은 이유로 ‘환불불가’ 조항은 약관규제법상 공정성을 잃은 약관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공정위의 시정조치를 취소하였는데, 대법원도 서울고등법원의 판단이 맞는다고 판단하였다.

① 환불불가 상품의 특성: 환불불가 상품은 환불가능 상품과 별개로 취급되는 독립적인 숙박상품이고 환불가능 상품보다 숙박대금이 보다 저렴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② 고객의 선택 자유: 고객은 여러 숙박상품의 가격과 조건을 비교하여 숙박예약을 할 수 있다. 고객에게 환불불가 상품과 환불가능 상품에 관한 실질적인 선택권이 부여되었고 그만큼 고객의 편익이 증가하였다.
③ 환불불가 상품에 대한 선택 동기: 사전 계획을 용이하게 수립할 수 있는 고객은 저렴하게 책정된 환불불가 상품을 선택하여 할인을 받을 수 가능성이 크고, 사전 계획을 수립할 수 없거나 손해배상예정금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고객은 환불가능 상품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④ 환불불가 조항으로 인한 고객의 이익과 불이익 비교: 숙박대금 대비 손해배상예정액의 비율 자체만 놓고 보면 고객이 숙박예약 취소 시 받는 불이익이 크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환불불가 상품의 가격은 환불가능 상품에 비하여 저렴하다. 그것이 부당하게 과중한지는 손해배상예정액과 결부된 할인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따져야 하고, 예상불이익이 예상이익보다 다소 높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해당 조항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고객보다 혜택을 받는 고객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환불불가 상품을 일률적으로 제거하는 경우 사전 계획을 용이하게 수립하여 할인을 받고자 하는 고객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와 고객의 후생이 전체적으로 감소할 여지가 있다.
⑤ 불가항력적인 상황의 구제: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발생할 경우 숙박업체가 고객에게 숙박요금을 청구할 수 없게 하고 있다.
⑥ 일부 고객의 피해 문제: 사전에 해당 조항을 충분히 고지함으로써 고객이 경솔하게 환불불가 상품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⑦ 숙박계약 취소로 인한 숙박업체의 손해: 숙박업체로서는 환불불가 상품의 예약을 받아 안정적으로 객실 사용률을 높이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공정위는 숙박업체가 어느 정도 손해를 입는지에 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약관규제법상 약관이 공정성을 잃어 무효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신의성실의 원칙’이다(법 제6조 제1항). 그리고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 고객이 계약의 거래형태 등 관련된 모든 사정에 비추어 예상하기 어려운 조항,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계약에 따르는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은 공정성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법 제6조 제2항). 이에 대하여 대법원은 “약관규제법 제6조 제1항, 제2항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문제 되는 약관 조항이 고객에게 다소 불이익하다는 점만으로는 부족하고, 약관 작성자가 거래상의 지위를 남용하여 계약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과 합리적인 기대에 반하여 형평에 어긋나는 약관 조항을 작성·사용함으로써 건전한 거래질서를 훼손하는 등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주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약관 조항의 무효 사유에 해당하는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인지 여부는 그 조항에 따라 고객에게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의 내용과 불이익 발생의 개연성, 당사자들 사이의 거래 과정에 미치는 영향, 관계 법령의 규정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여 왔다(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3다214864 판결,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0다278873 판결 등 참조).

서울고등법원은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단기준에 따라 ‘환불불가’ 조항으로 인해 고객에게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의 내용과 불이익 발생의 개연성, 당사자들 사이의 거래 과정에 미치는 영향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그것이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고객에게 불이익한 약관인지는 계약의 전체적인 내용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고, 이때 고객 집단의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이익을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부 고객에게 또는 일부 내용이 불이익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약의 전체적인 내용이 고객 집단의 평균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조정된 경우라면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쉽사리 판단해서는 아니 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약관규제법은 제7조 내지 제14조에서 구체적인 약관 무효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즉, 상당한 이유 없이 사업자의 책임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조항(제7조), 고객에게 부당하게 지연손해금 등의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시키는 조항(제8조), 부당한 계약의 해제·해지 조항(제9조), 채무의 이행에 관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제10조), 고객의 권익에 관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배제하거나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조항(제11조), 의사표시를 의제하는 조항(제12조), 대리인의 책임을 가중하는 조항(제13조), 소송 제기의 금지 등 조항(제14조)은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만약 필자가 숙소를 고를 당시 해당 앱에서 ‘취소불가’ 상품임을 쉽게 알기 어려운 위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알린 채 단순히 최저가 상품이라는 점만 부각함으로써 필자가 ‘취소불가’ 상품임을 알지 못한 채 이를 골랐다가 이후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해당 예약을 취소하려 한다면, 해당 앱 운영업체나 숙박업소에서는 ‘취소불가’ 상품으로서 공정성을 잃은 약관조항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업자는 고객이 약관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작성하고, 표준화·체계화된 용어를 사용하며,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부호, 색채, 굵고 큰 문자 등으로 명확하게 표시하여 알아보기 쉽게 약관을 작성하여야 한다(법 제3조 제1항). 그리고 사업자는 계약을 체결할 때는 고객에게 약관의 내용을 계약의 종류에 따라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방법으로 분명하게 밝혀야 하고(제2항), 약관에 정하여져 있는 중요한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한다(제3항). 사업자가 위 제2항 및 제3항을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는 해당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제4항). 여기서 설명의무의 대상이 되는 ‘중요한 내용’은 사회통념에 비추어 고객이 계약체결의 여부나 대가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을 말하고, 약관조항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 내용에 해당하는지에 관하여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사건에서 개별적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13. 2. 15. 선고 2011다69053 판결). ‘취소불가’상품이라는 점은 사회통념에 비추어 필자와 같은 고객이 계약체결의 여부나 대가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이므로, 설명의무의 대상이 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당 앱 운영업체나 숙박업체는 이를 쉽게 알기 어려운 위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알렸으므로, 비록 그것이 공정성을 잃은 조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를 계약내용에 편입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엄격한 규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온라인 다크패턴(소비자의 착각, 실수, 비합리적 지출 등을 유도할 의도로 설계된 온라인 화면 배치)도 사실 이러한 약관의 명시·교부·설명 의무와 맞닿아 있다. 사업자로서는 소비자와 전자상거래 등을 할 때 소비자가 거래조건을 정확히 이해하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설계·운영하여야 함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i>* 변호사,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필자가 속한 법률사무소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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